껍데기만 남은 대우의 ‘세계경영 신화’
  • 박준용 기자 (juneyong@sisajournal.com)
  • 승인 2017.03.21 15:30
  • 호수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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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50년, 대우그룹의 어제와 오늘 증권·건설·조선은 여전히 대우 이름 남아

 

“우리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세계경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혹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혹은 강한 자부심과 긍지로 남아 있을 ‘세계경영’…(생략)” 대우그룹 전직 임직원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홈페이지에 적힌 글이다. 대우 해체 이후 약 18년이 흐른 뒤에도 남은 ‘대우맨’의 자부심을 보여준다. 이 자부심의 원천은 뭘까. 바로 그들이 추억하는 ‘화려한 시절’이다.

 

대우그룹의 성장은 당시 ‘신화’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만큼 성장세가 가팔랐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만 30세 때인 1967년, 서울 중구에 열 평 남짓한 대우실업 사무실을 차린다. 시작은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의 작은 회사였다. 하지만 대우는 당시 박정희 정부의 수출 주도 정책과 맞물려 3년 만에 수출 1억 달러(약 1146억원)를 달성했다.

 

김 전 회장은 기업이 성장궤도에 오르자 사업영역 확장에 ‘올인’했다. 대우는 1973년 일성신약 창업주가 세운 ‘동양증권’을 인수하며 증권업에 뛰어들었다. 또 그해 대우건설을 설립해 건설업에 진출했다. 이듬해에는 대우전자를 세우며 전자제품 시장에도 발을 들였다. 1978년에는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해 조선업에 진출했고, 1983년에는 대우자동차를 출범시켰다.

 

1972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수출훈장을 받고 있다. ©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차입경영·분식회계로 막 내린 ‘대우 신화’

 

김 전 회장의 사업영역 확장은 ‘업종’에만 머물지 않았다. 1980년대부터 해외 신흥시장 공략에 나섰다. 중국·우즈베키스탄·베트남·말레이시아·폴란드 등에 ‘대우군단’이 진출했다. 대우그룹은 신흥시장 공략을 성사시키며 1997년에 매출 71조원, 자산 78조원의 한국 재계 순위 2위 기업에 올랐다. 대우가 당시 얼마나 해외 진출에 주력했는지는 김 전 회장이 1993년 발표한 경영방침 ‘세계경영’의 슬로건이 말해 준다. ‘세계를 우리의 시장으로, 지구촌을 우리의 산업기지로.’

 

하지만 ‘대우 신화’의 실상은 화려한 겉모습과 달랐다. 속은 오래전부터 곪아갔다. 이는 사업 확장만 중시한 채 재무구조 개선에 신경 쓰지 않는 대우의 경영방식 때문이다. 이 때문에 1998년 말 대우의 차입금은 44조원에 달했다. 부채비율은 371.5%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대우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은 멈추지 않았다. 1998년 4월에는 쌍용차를 인수하기도 했다. ‘세계경영’은 어쩌면 빚으로 쌓은 탑이었던 셈이다.

 

‘대우신화’의 그늘은 또 있었다. 분식회계다. 대우그룹의 분식회계 의혹은 1990년대 중반부터 제기됐다. 대우그룹의 해체 과정을 그린 책 《대우 자살인가, 타살인가》를 보면, 1995년 대우의 재무제표를 감사한 일부 젊은 회계사들이 이미 대규모 분식회계를 감지했다. 이들은 양심선언을 시도하다 무산되기도 했다. 1997년에는 금융 당국도 대우 분식회계 일부를 포착한다. 1997년 5월 증권감독원(현재 금융감독원)은 1996년 대우가 사업보고서에 자산과 부채를 턱없이 적게 기재한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금융 당국은 이 정도 분식회계가 순이익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판단해 대우에 시정조치만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오판이었다. 이후 밝혀진 대우그룹의 분식회계 규모는 41조원에 달했다.

 

1990년대 후반, 곪은 대우의 속내는 마침내 터진다. 외환위기 이후 초고금리가 지속되면서 부채비율이 높은 대우가 버티기 어렵게 된 것. 1999년 8월26일, 마침내 금융 당국은 대우 계열사 12개사를 기업개선작업 대상으로 선정한다. 창업 32년 만에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대우 파산의 후폭풍도 컸다. 대우가 남긴 부채는 89조원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 파산’은 대우에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까지 구조조정으로 내몰았다.

 

김 전 회장은 1999년 대우 파산 직후 출국했다. 그는 2005년 귀국해 그해 6월 대우의 횡령과 분식회계를 주도하고, 국외로 자산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법원은 그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1심은 징역 10년에 추징금 21조4484억원을, 항소심은 징역 8년6개월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했다. 김 전 회장은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았고 2008년 1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앞줄 오른쪽 네 번째)은 베트남·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차세대 기업가 양성에 나서고 있다. ©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김우중 前 회장, 동남아서 ‘김우중 키즈’ 양성

 

석방된 이후에도 김 전 회장은 화제의 중심에 섰다. 2014년 김 전 회장이 “대우가 정부 주도로 기획 해체됐다”고 주장하면서다. 그는 대담집 《김우중과의 대화》를 통해 “정부가 수출금융이 막혀 벌어진 일을 우리가 잘못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건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대우 해체의)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성자동차를 대우에 넘기고 대우전자를 삼성으로 넘기는 ‘빅딜’ 등을 경제 관료들이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대우 구조조정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대우가 흔들리면 시장에 2차 파동이 엄청날 텐데 왜 정부가 나서서 흔들려고 했겠느냐”면서 빅딜·투자유치 방해설을 일축했다. 이 전 부총리는 또 “구조조정을 해야 기업도 살고 금융도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서 “대우는 구조조정에 가장 소극적이었고 늘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시장의 외면을 받았던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 회장은 석방 이후 베트남을 주요 활동무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는 베트남에서 2012년부터 차세대 기업가 양성 프로그램인 ‘글로벌청소년사업가양성사업(글로벌YBM)’을 시작했다. 이른바 ‘김우중 키즈’ 양성 사업이다. 베트남에서 시작된 이 사업은 현재 미얀마·인도네시아 등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또 그는 청년뿐 아니라 은퇴자의 ‘인생 2모작’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2015년 김 전 회장은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통해 은퇴자를 베트남 현지에 취업시키는 프로그램도 구상해 실행에 옮기고 있다.

 

대우가 남긴 ‘자산’인 대우 계열사들은 그룹 해체 후 어떻게 됐을까. 옛 대우 계열사는 현재 국책은행이나 대기업에 인수돼 여전히 각 산업군의 주요 기업으로 남았다. 특히 현재 미래에셋증권에 인수된 대우증권은 업계 1위를 고수해 왔다. ㈜대우의 건설부문은 대우건설로 출범했고, 무역부문은 2010년 포스코에 인수돼 종합무역상사로 명맥을 잇는다. 이외에도 대우자동차는 한국GM, 대우중공업의 기계사업부문은 두산인프라코어가 됐다. 대우중공업의 조선해양부문인 대우조선해양은 최근 5조원대 분식회계 의혹과 수주 절벽에 직면했지만, 규모로는 삼성·현대중공업과 함께 ‘조선업 빅3’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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